관성을 깨지 못하면 도태된다: 브랜드마케터가 제품개발을 하기까지
— 그로스실 방태욱 실장
— 그로스실 방태욱 실장
방태욱님은 브랜드 마케터였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지금은 마이리얼트립에서 여행자 인앱 경험을 책임지는 그로스실을 이끌고 있고, AI 챔피언 제도를 통해 최저가 항공권 탐색 서비스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습니다.
역할을 확장한 것도 놀라운데, 이제는 직접 운영 서버에 코드를 배포합니다. TripSignal(트립시그널)이라는 예산 기반 여행지 추천 기능을 만들었고, 그 기능은 지금 마이리얼트립의 ‘내여행’ 탭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외로이 존재하는 야자수’를 없애고 싶었다
시작은 단순한 불만이었습니다.
마이리얼트립에서 가장 많이 클릭되는 메뉴는 ‘홈’과 ‘내여행’입니다. 그런데 ‘내여행’ 탭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정된 여행이 없는 사람에게는 야자수 이미지 하나가 덩그러니 나올 뿐, 아무런 상품 제안이 없었습니다.

“저는 맨날 이거를 장난으로 ‘외로운 야자수’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비즈니스가 0이니까 뭐라도 보이면 0보다는 크겠지라고 생각했죠.”
태욱님은 항상 리텐션 구조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돌아올 수 있는 구조, 디스커버리할 수 있는 경험. 그런 게 필요했는데, 야자수만 덩그러니 있으니 답답했던 거죠.
럭키글라이드에서 배운 것: 마케터의 감각으로 API를 파헤치다
태욱님의 첫 시도는 럭키글라이드였습니다. 도시별, 일정별 최저가 항공권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서비스. 이 프로토타입은 이후 개발팀에서 고도화하여 정식 서비스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럭키글라이드를 만들면서 항공 API에 대한 구조들을 알았고, 최저가를 어떻게 분석해야 되는지도 알았어요. 그다음에 해보고 싶었던 게 숙소를 로드해서 플래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였어요.”
마케터의 감각이었습니다. 고객에게 여행과 관련해서 보여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정보가 뭘까. 가격이 언제 싼지, 어디로 가면 예산에 맞는지. 그런 질문에서 시작해서 API 구조를 하나씩 파헤쳐 나간 겁니다.
퇴근 후 집에서 클로드와 개발자 도구를 열어 놓고 숙소 가격 API를 분석했습니다. 항공과 비슷한 구조라는 걸 알게 되자, 둘을 묶어서 서비스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트립시그널의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프론트엔드 AI 어시스턴트와 함께 개발하다
트립시그널 개발에는 특별한 도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같은 실 소속 김경훈님이 만든 ‘프론트엔드 AI 어시스턴트’라는 레포지토리였습니다.
“경훈님이 프론트엔드 AI 어시스턴트라는 레포를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어, 잘됐다. 나 프론트엔드 해보고 싶었는데, 이 어시스턴트를 가지고 개발을 해보자라고 했죠.”
이 어시스턴트는 프론트엔드 개발에 필요한 의존성을 설치하고, 어떤 폴더들을 다운받아야 하는지 알아서 처리해 주었습니다. 태욱님은 원하는 기능을 설명하고, PRD를 만들고, 그것들을 실제 코드로 구현하는 과정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얼기설기 만들어진 코드는 팀원들의 코드 리뷰를 통해 정교해졌습니다. 병준님과 란님이 프론트엔드 코드 리뷰를 해주었고, 태욱님은 그 피드백을 받아 클로드에게 “해줘”를 반복했습니다.
안 되면 롤백하면 돼: 배포에 대한 두려움을 넘다
럭키글라이드는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개발팀이 고도화했습니다. 하지만 트립시그널은 달랐습니다. 기획부터 배포까지 전 과정을 직접 해야 했습니다.
“막상 해보고 나니까 기술적으로 엄청 어렵진 않았거든요. 근데 가장 어려운 거는 모노레포에다가, 운영 서버에다가, 내가 이거를 배포해도 되나라고 하는 그 두려움이 되게 컸어요.”
태욱님은 여러 사람에게 이 두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CTO 허원진님과 플랫폼 총괄 권희준님 모두 같은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안 되면 롤백하면 되니까 걱정말고 그냥 지르라고, 두 분이 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안 되면 롤백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일단 해봤어요.”
트립시그널은 39개 도시를 분석해서 예산과 여정에 맞는 여행지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기능은 지금 운영 서버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조직이 바뀌기 시작하다: 나도 해볼까?
트립시그널이 배포되고 실 분위기가 한 층 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어, 나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조금씩 드시는 분들이 생겼고요. 그다음에 오히려 제가 역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됐어요. ‘뭐 이런 거 만들고 싶다고 개발자 기다리고 있지 말고 그냥 해’라고요.”
실제로 팀원들이 마케팅 파트너 페이지나 광고 내부 서버에 직접 배포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립시그널을 내부에 공유했을 때 “저는 월별 셀렉트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피드백이 왔고, 고도화 후 바로 배포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 선순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로스엔지니어링팀에서는 트립시그널을 아예 플래너로 디벨롭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관성을 역행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태욱님에게 가장 큰 장벽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관성이라고 했습니다.
“아직까지 아침에 와서 주간 리포트를 구글 스프레드시트 보고, 데이터 열고, 복사 붙여넣기 하고, VLOOKUP 걸고… 이렇게 하는 과정이 몸에 익은 거예요. 한 시간 정도면 된다고 생각하면, 이걸 8시간, 10시간 들여서 자동화해야 될 이유를 크게 못 찾는 거죠.”
문제는 그런 30분짜리 작업이 하루에 대여섯 개 쌓이면 업무 시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욱님은 클로드 맥스를 회사에서 지원받자마자 슬랙과 위키 1년치를 다 로드해서 맥락 데이터를 정리했습니다. 암묵지처럼 정해져 있던 정책들을 문서화하고, 떠돌던 내용들을 싹 업데이트했습니다.
“관성 디스럽션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예요.”
바쁘다는 감각에 취해서 살지 마라
태욱님은 의외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오히려 벽에 부딪힌다고요.
“게으른 사람들이 오히려 시도해보려고 해요. 게으름의 끝판왕인 사람이 더 활발하고 열정적이고요. 효율에 엄청 집착하거든요.”
반면 부지런하게 수작업을 해왔던 사람들은 자신의 부지런함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익숙한 방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마음의 벽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관성이 큰 사람들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마케터로 예시를 들자면, 예전부터 다양한 매체들에서 성과들을 빠르게 수기로 입력해서 리포트를 잘 만들어 오던 사람들이 오히려 접근을 못 하고 있어서요.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을까가 요즘 저의 최대 관심사예요.”
요즘 태욱님이 팀장님들과 원온원할 때 계속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쁘다는 감각에 취해서 살지 마라. 거기에 취해서 살면 진짜 임팩트 있는 일이나 진짜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을 못 해요. 하루 종일 8시간 동안 전화 통화했다고 칭찬해 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매출을 몇 백만 원이라도 늘려야 칭찬받는 거지.”
주간 성과를 리뷰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없애고 있습니다. 리뷰는 각자 클로드로 시키고, 회의에서는 방안에 대해서만 얘기하자. 그렇게 바꿔 나가고 있습니다.
절박함: 이 열차에 무조건 타야 한다
태욱님은 브랜드 마케터로 오래 일해왔습니다. 지금은 그로스실을 이끌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AI와 개발에 매달리는 걸까요.
“40대가 되면 앞날에 대한 고민이 엄청나게 많아지는데, 이 시대를 못 하면 난 끝난다는 생각으로 이걸 마주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해라, 라고 하고 있어요.”
태욱님은 “강제 창업의 시대”가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회사는 마케팅팀이 한 명인데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요. 다른 회사의 마케팅팀이 몇십 명 단위인 경우도 허다한데, 한 명으로 가능해진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뇌를 위탁하는 폴더: 나만의 지식 관리 시스템
태욱님에게는 ‘마리트 그로스’라는 폴더가 하나 있습니다. 뇌를 위탁하는 폴더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페르소나 25개랑 팀별 맥락 정보들이 폴더링이 되어 있거든요. 세션이라는 게 있어서 매일 논의했던 거를 별도의 파일들로 저장해 놓으면, 특정 키워드가 나왔을 때 예전에 있었던 맥락 정보들을 싹 트리거해 줘요.”
예를 들어 “A 캠페인에 대해 얘기하자”라고 하면 관련 마크다운들을 로드해서 “캠페인 며칠에 시작하기로 했었지?”라고 물으면 “5월 11일입니다”라고 답이 나옵니다.
이 시스템을 팀원들에게도 가르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지식 관리 시스템을 통해 복제된 팀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관성을 깨는 것이 시작이다
태욱님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관성을 깨겠다는 의지였습니다.
브랜드 마케터로 시작해서 프로덕트 엔지니어로 불리게 된 방태욱님. 그 변화의 핵심은 API를 배운 것도, 코드를 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외로이 존재하던 야자수를 없애고 싶다는 단순한 불만에서 시작해서, 럭키글라이드로 API 구조를 배우고, 트립시그널로 운영 서버에 배포하기까지. 그 여정의 핵심은 “안 되면 롤백하면 되지 뭐”라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